화창한 가을철에 건강을 위해 푸르른 하늘과 맑은 공기를 만끽하려고 길을 나섰다. 광주대구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경남 거창군 가조면 우두산(牛頭山) 중턱 해발 760m에 위치한 고견사로 달려갔다. 사찰로 가기 위해서는 차로가끝나는 깊숙한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켜 놓고 약 1.2Km정도의 가파른 산길을 걸어 올라가야 했다. 물론 모노레일이 있긴 있으나, 그 용도는 물자를 운반 하는 것으로만사용한다고 한다. 길가는 중간 중간에 계곡에서 흐르는 작은 계곡물과 견암폭포의 시원한 물소리를 들을수가 있었다. 그러나 올라가는 길이 만만찮아 연신 숨을 헐떡이며 두어 번 쉬어가야만 했다. 막 도착한 사찰 입구에는 ‘우두산고견사(牛頭山古見寺)’라는 사찰명칭이 적혀있었다. 그 문을 통과하자마자 28m 높이의 1000년 된 은행나무가 제일 먼저 반겨 주었다.
‘고견사(견암사)’는 범종각 사성각 석불각 등을 제외하고 약 대엿 채 정도의 아담한 건물이 분포하고 있는 작은 사찰이라, 직접 가보면 웅장한 느낌은 전혀 안 든다. 거기다가 건물들 크기도아담한 사이즈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약 1352년의 역사를간직한 고찰이라고 생각하니, 고즈넉하고 품위를 갖춘, 엄한역사의 중압감이 밀려왔다. 사찰 제일 위쪽에는, 바위 벽면에조각하여 조성한 마애불이 있고, 그 위쪽 먼 북편에는 가야산의 한줄기인 의상봉(1032m)과 우두산(1046m)이 위치하고 있었다. 그 옛날 해인사보다 먼저 창건된 영남 굴지의 사찰로써, 수륙제를지내던 그 웅장하고 화려했던 사찰의 모습은 간데없고, 폐사가 된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근대에 새로이복원된 오늘날의 ‘고견사’의 모습은 그저 그런 해인사의 말사로써 작은 규모의 크기일 뿐이었다. 그렇지만오늘 다녀온 고견사는, 산길 산행과 더불어 건강이 좋지 않아 방문하고 있는 탐방으로는 가장 의미 있고유익한 곳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거창군 가조면에 있는 '견암사(見巖寺) 또는 고견사(古見寺)'는 신라 30대 문무왕 7년(서기667년) 원효, 의상 양대사가 전국을 순회 하던 중 우두산에 도착하여 사방을 둘러보니 산세가 너무나 아름답고 수려하여 이곳에 산막을 치고 수도장으로 상아 불법을 선도하니신도가 많아져서 절을 지어니 이것이 고견사(古見寺, 견암사) 창건 연원이다. 고견사를 시대의 변천과 함께 그 이름도 見庵寺(견암사), 三巖寺(삼엄사) 등 여러 가지로 불리어 왔다. 또한 해인사를 창건할 때에 재정, 기술, 성물 등을 고견사에서 가져다가 건축하니 고견사를 해인사의 큰집이라 하였다. 해인사보다 135년이나 먼저 창건된 古사찰이다. 또한 통도사의 말사로 한때 견암(見庵), 견암사(見庵寺:見巖寺), 견암선사(見庵禪寺)라고 불렀다. 신라 애장왕(재위 800~809) 때 순응(順應)과 이정(理貞)이 창건했으며, 고려시대인 1360년(공민왕 9)에달순(達順)과 소산(小山)이 김신좌(金臣佐)와 함께 중수했다.
◯ 이 사찰은우리 거제도와의 인연이 아주 깊다. 옛날 고려말에서 조선초기까지 당시 거제현 관아는 현재 우리 거제도에위치한 것이 아니라 거창군내, 거제현(가조현)으로 존속하고 있을 때(거제內 현청 관련자들만 피난), 거제현내에 견암사가있었던 것이다. 당시 많은 지명이 거제도로 옮겨와 사용되었고, 또한우리 거제도의 지명도 현재 거창군내 곳곳에 남아있다. (거제현관청 가조면 존속 1272년~1421년)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사절요', '목은시고(牧隱詩藁)', '신증동국여지승람', '조선왕조실록'등의 거제현 '견암사또는 고견사' 사찰의 기록에, "경상도 거제(巨濟) 견암사(見巖寺, 古見寺)는 원속전이 50결인데, 이번에 1백결을 더 주고, 거승은 70명으로 정하고, 태조가 고려의 왕씨(王氏)들을 위해서, 매년 5월과 10월에 내향(內香)을 내려서수륙재(水陸齋)를 실행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견암사 절에 소속된 토지가 50결(약 5만4천4백50평)정도에 1백결(약10만 8천 900평)을 더 얻었으니 그 규모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다. (절에 소속된 노비 등도 수백명이었다).
● 다음은 1470년, 김종직(金宗直)이 함양군수로 재직時, 고려 때피난 와서 살다가 조선초기 거제도로 돌아가지 않고 거창군 가조현에 남아 살고 있는, 거제 유민(留民)의 평화로운 모습을 보면서, 지나간 거제민의역사를 상기하며 읊조렸다.
◯<가조현에서 자다(宿加祚縣)>
김종직(金宗直,1431~1492)
“가조현은 거창(居昌)의 속현(屬縣)인데, 고려시대 삼별초(三別抄)의 난이 있을 때에 거제(巨濟)의 이민(吏民)들이 바다를 건너 이곳에 도망쳐 와서 부쳐 살았다. 그러다가본조(本朝) 초기에 와서는 그들이 옛 고장으로 돌아갔는데, 지금도이 고을을 거제라 부르고 있고, 또 마을 이름도 아직까지 아주(鵝洲)ㆍ송변(松邊)ㆍ오양(烏攘)등의 칭호를띠고 있다.”(縣屬居昌高麗三別抄之亂巨濟吏民渡海奔逬于此遂僑寓焉本朝初還其舊土至今號此縣爲巨濟又村名尙帶鵝洲松邊烏攘等稱)
桑柘人居密 농사 짓는 사람이 빽빽히 사는데 空留海島名 공연히 섬의 명칭이 남아있구려 溪山共隱逸 계산은 은거한 선비들과 함께하고 父老說升平 부로들은 태평 성대를 말하네 夜靜豚鳴圈 고요한 밤엔 우리에서 돼지가 울고 簷虛月到楹 텅 빈 처마엔 달이 기둥을 비추누나 酒醒仍喚燭 술이 깨자 촛불을 부르고 보니 方信俗塵縈 이제야 속진에 얽혔음을 믿겠네